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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낯선 세상속으로/브르타뉴

아름다운 중세도시 비트레(Vitr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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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지방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가장 먼저 가본 곳이 비트레(Vitré)였다. 많은 브르타뉴의 도시들 중에서 비트레를 가장 먼저 갔던 건 아주 우연한 일이다. 프랑스에서 전문 무용수로 활동하는 한 한국 친구가 그곳에서 공연이 있다며, 초대를 해 준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도 만나고 비트레도 구경할 겸해서 갔지만, 이 작은 동네에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차역에서부터 먼 발치로 보이는 웅장한 고성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천년이 넘은 거대하고 육중한 느낌의 비트레 성은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자고 있었던 성이 저런 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준다. 장중하고 위용있는 성의 모습에 비트레에 도착하자마자 놀라고, 골목에 촘촘이 줄지어 서있는 15~16세기의 오래된 꼴롱바주 집들에 눈이 휘둥그래졌던 기억이 난다. 한마디로 비트레는 타임머신으로 서양의 중세 어느 지점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게다가 그날은 날씨도 춥고 간간히 비까지 뿌려져, 중세의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러다가 비트레를 다시 찾은 건 그 이듬해 가을, 햇볕이 유난히 좋았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맑은 햇볕 속에서 다시 보니, 을씨년스러운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도시는 고풍스럽고 낭만적인 느낌으로 가득했다.

 


푸제르(Fougères)처럼 비트레도 옛날 프랑스와 브르타뉴의 국경에 위치한, ‘막슈 드 브르타뉴’(les Marches de Bretagne: 브르타뉴의 변방들)의 한 도시이다. 고성을 비롯해 중세의 문화유산들로 넘쳐, 프랑스에서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분류되어 있고 ‘들러볼 만한 매우 아름다운 곳’의 목록에도 올라 있다.



성밖의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이 건설된 직후인 13세기에 비트레는 돌로된 성벽으로 둘러쳐진다. 현재도 절반 가량 북쪽과 동쪽의 계곡을 낀 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지만, 기차역으로 향한 남쪽부분은 모두 파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미 건물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도시 한복판에 성벽을 복원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시내를 구경하다가 한 쇼핑센터 안에서 성벽의 흔적을 발견했다. 쇼핑센터 지하에 위치해 있는 성벽과 망루의 유적들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도록 유리창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유리 안 쪽으로 제법 큰 규모의 성벽과 한 망루의 옛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서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유리창에 딱 붙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라도 문화유적과 현재의 삶이 공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모습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일요일이라 상점의 문이 닫혀 있어서 좀 더 자세하게 유적지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특히, 비트레에는 15, 16세기 해상무역가들의 생활모습을 잘 보여주는 특색있는 꼴롱바주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골목길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꼴롱바주 집들 중에서도 반원형 문을 가진 집, 상부돌출의 삼각뾰족지붕을 가진 집, 아르두와즈로 갑옷을 입힌 집들이 특색있기로 유명하다. 


또 16세기부터는 상업도시로서 번영을 이룩했다. 비트레는 배의 돛이나 상품포장용으로 쓰이는 큰폭의 대마천을 생산지로 유명했다. 이곳 상인들은 대마천의 국제무역을 담당했는데, 이들의 상품은 영국, 플랑드르, 독일, 스페인, 포루투칼, 멀리 라틴아메리카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 이런 번영 속에서, 당시 비트레는 6~7천명의 주민이 살았다. 이 숫자는 렌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구였다고 한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직조산업은 몰락하고, 현재는 농업과 유제품의 생산지로 활기를 띄고 있다. 또 이 생산품을 바탕으로 1970년대부터는 농산물 가공및 신발산업으로 활기를 되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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