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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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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 시청의 시민청 시티갤러리에서는 한불수교 130주년을 축하하는 전시로서 제2차 세계대전당시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비시 정권과 그 부역자들을 어떻게 청산했는지를 소개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친일파를 전혀 청산하지 못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이라는 불어로 '협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함께 협력해 공동으로 무언가를 할 때, 'collabor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C를 대문자로 쓴 'Collaboration'이라는 단어는 '적국에 대한 부역행위'를 뜻하는 단어로 자리잡았다.

비시정부의 수장이던 패탱이 1940년 10월 30일 라디오 연설을 통해, "오늘 나는 협력의 길에 들어선다"라고 선언한 데서 이 단어의 의미가 '부역행위'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부역자들로는 장관, 매수된 아나운서, 작가, 언론인, 지식인, 저소득자, 가수, 밀매상, 공무워, 자본가, 경찰관 등등, 특별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프랑스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상징은 비시정권의 앰블럼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한몸이었던 고대 프랑크왕국을 상징하는 양날도끼가 이용되었다. 

​이 사진은 패탱과 히틀러가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만나 악수하는 장면이 담긴 기념 엽서이다.

​프랑스의 비시정권은 유대인을 잡아 수용소로 강제 이송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나치의 유대인학살과 관련해 프랑스인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건 프랑스의 유대인들을 독일군이 잡아간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이 적극적으로 소집해서 기차를 태워 보냈다는 데 있다.

​비시정권은 나치와 협력해 유대인들만 학살한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자들도 조직적으로 탄압당했다는 걸 알려주는 반공주의 포스터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치에 협력한 비시 정권은 재판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그 수장이었던 패탱 역시 재판을 통해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고령이라는 점을 고려해 드골대통령은 종신형으로 감형시켜주었고, 1951년 드외섬에서 수감 중 사망했다.

비시 정부의 정부수반 장관 국무서기 등 모두 108명이 나치 부역자로 평가되어 재판을 받았다.

프랑스은 1945년부터 시작된 나치 부역자 청산 재판에서 총 30만 건의 서류가 검토되었고, 12만 7천 건의 재판이 행해졌다.

그 가운데 9만 7천 명이 나치 부역행위로 인해 5년형부터 최고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 중에는 1948년에 791명, 1952년에 767명이 사형 집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는 나치부역자들의 완전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있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뒤, 친일파 청산을 전혀 하지 못한 우리에게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청산 역사는 눈여겨 볼만하다.

이 전시는 다른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나를 돌아보게 되는 매우 의미있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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