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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멈춰 서서

정호승의 '꿈속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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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에서 읽은 정호승의 시...
그 중 내게 큰 감동을 준 시는 '꿈속의 꿈'이다.

이 시집은 정호승 시인이 5년만에 낸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삶의 진실을 깨달은 듯하다.
내내 나를 떠나지 않고 머리에 찬물을 붓는다.


꿈속의 꿈

나를 못 박을 무거운 십자가 하나 등에 지고
여름산을 오른다
조금만 발걸음을 멈추어도 누가 채찍을 내리친다
목이 마르다
무릎을 꺾고 땅에 쿵 십자가를 내려놓는다
한 여자가 달려와 발길로 물그릇을 차버린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갈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그분의 말씀이 들린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라
나는 얼른 그분한테 달려가 무릎을 꿇는다
십자가를 좀 바꾸어주세요
도저히 무거워서 지고 갈 수가 없어요
그가 빙긋이 웃으면서 나를 어느 숲으로 데리고 간다
숲에는 누가 버리고 간 것일까
크고 작은 수많은 십자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골라보렴
나는 그분의 말씀대로 이것저것 몇날 며칠 고르다가
가장 작고 가벼워 보이는 십자가를 하나 골라
등에 지고 다시 산을 오른다
여전히 십자가가 무겁다
등이 휠 것 같다
몇걸음 떼어놓지 못하고 다시 쿵 십자가를 내려놓자
그분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말씀하셨다
그 십자가가 원래 네가 지녔던 바로 그 십자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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