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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멈춰 서서

첫서리 직전, 호박잎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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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동네에 있는 관악산 야트막한 기슭을 걸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간 탓에 주말임에도 산기슭은 한산했다.

요즘같이 날씨가 좋고 아름다운 단풍철에는 등산객으로 엄청 붐빈다.

올라가는 사람도 하산하는 사람도 모두 떠난 늦은 오후의 산길은 무척 한산하고 고즈넉한 느낌까지 주었다.


그저께, 그러니까 지난 목요일에도 오후에 잠시 다녀갔는데, 이틀 새 날씨가 퍽 쌀쌀해졌다.

이제는 장갑을 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린 손을 주머니에도 넣었다 뺐다하면선 산으로 향했다.

등산로를 채 접어들기 전, 줄지어 서있는 농가 담장에 넝쿨져 있던 호박들이 모두 서리를 맞고 시들어 있다.

분명 목요일까지만 해도 싱싱한 초록의 호박잎들로 덮혀 있었던 걸 기억하는 나로서는 놀랍기만 했다. 

이틀 사이에 서리가 내렸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올해 내린 첫서리였을 것이다.

서리를 맞아 축 느러진 호박잎은 먹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서리가 내리기 직전에는 호박잎을 한가득 따서 호박잎 쌈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쌈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좋아할 맛은 아니지만, 1년에 한두번 정도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별미였다.

호박잎쌈은 꼭 서리가 내리기 직전, 한번이나 두번 정도 먹었고

거짓말처럼 호박잎쌈을 먹고 나면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서리가 내리기 전에 호박잎을 먹어야 한다!" 하셨다.

그 이유를 알 턱이 없던 나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며, 쌀쌀한 가을날 쌈장과 곁들인 따끈한 호박잎쌈을 맛나게 먹었다.

서리를 맞은 호박잎들을 보니 옛날 호박잎쌈을 먹었던 그 시절, 그 분위기가 기억보다 피부로 먼저 전해져왔다. 


서리가 내리고 호박잎도 모두 죽고...이제 곧 날도 추워질 것이다.

장갑을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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