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언 유년 시절, 꼭 한 해 꽃밭에 피었다가 사라진 백일홍이 불현듯 생각난 것은
우리 단지 내에 있는 한 상가 앞, 화분에 피어있는 백일홍 꽃 때문이었다.
꽃 한 송이가 백일을 피어있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 했던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꽃이 되었다는 전설은
어린 내가 듣기에도 가슴이 절여
꽃이름만 들어도 뭉떵뭉떵 가슴이 무너져내렸었는데,
아버지는 꽃밭에서 한 꽃 송이를 가리키며
저것이 백일홍이란다 했다.
그러나 그 해 여름내내 피어있던 백일홍을 보면서
처음의 애절함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그 지루함이란...
화석처럼 꽃잎들이 퇴색한 뒤에도
지루해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천천히 그 꽃은 시들어갔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마음이셨을까?
우리는 서로 마음을 나누지도 않았건만,
다음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다시는 꽃밭에 백일홍을 심지 않으셨다.
그렇게 다 잊었다.
금방, 그 여름의 지루함도
그 꽃의 애절한 전설도
그리고 그 해 여름조차
모두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백일홍 꽃을 보자 그 해 여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고는 나는 그렇게 지루하게조차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세월이 지나면 다 잊혀질 거라고
사람들은 모두 다 그렇게 산다는, 그 상투적인 말대로
그렇게 나도 다 잊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쩜 그렇게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처럼 기억의 끈을 꼭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잊을 것 같아서
놓쳐버릴 것 같아서
지루하고 촌스럽게만 느껴졌던 백일홍을
지금은 아름다운 눈으로 본다.
먼 기억 속, 퇴색한 잿빛 꽃잎들조차 환한 눈부심으로
가슴이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