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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낯선 세상속으로/브르타뉴

프랑스 브뤼쯔(Bruz), 폭격의 상흔을 간직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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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에서 시내버스로도 갈 수 있는 ‘브뤼쯔’(Bruz)를 간 건 꼭 그 도시를 방문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브뤼쯔 옆, ‘보엘’이라는 작은 마을에 존재하는 물레방아와 넓게 흐르는 빌렌느강을 구경하고 싶어서 잠깐 거치게 된 곳이 브뤼쯔였다. 

그럼에도 처음 방문하는 곳이니, 그냥 지나쳐갈 수는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관광안내소를 들러 도시의 구경거리가 표시된 지도와 역사가 소개되어 있는 자료를 받아왔다. 



실제로 이 곳을 오기 전부터 브뤼쯔 시내에 있는 성당은 ‘20세기 현대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특색있는 건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나는 브뤼쯔 성당을 꼭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면서도 ‘브르타뉴 대부분의 마을에 있는 고딕풍의 중세성당이 아니라, 왜 20세기 성당이지?’하는 의문에는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속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그 성당이다. 

이 성당은 브르타뉴 일에빌랜느 지역에서 흔하게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있는 붉은색 편암으로 지어졌다.



성당 한 귀퉁이에 설치된 안내판이 20세기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성당이름은 생-마르탱(Saint-Martin)성당으로, '루이 수이나르'(Louis Chouinard) 건축가에 의해 1954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도착한 때는 성당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곳은 정해진 시간에 방문이 허락되는 성당이었다는 걸 도착해서야 알았다. 

그저 성당 밖에서 건물을 둘러보는 데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건물 답게 성당은 건축가의 예술성이 돋보이는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그런데 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이 도시의 역사를 읽다가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1944년 이 도시에 연합군의 폭격이 있었고, 그 폭격으로 브뤼쯔의 많은 주민이 죽고,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브뤼쯔성당도 그 때 폭파되어 새로 지은 것이 이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전쟁의 피해자인 프랑스에 연합군의 폭격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던 상태였다. 

생말로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사실에도 많이 놀랐는데, 그런 곳이 한두곳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브뤼쯔는 내륙 깊숙히 위치한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는데, 폭격을 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자세히 알아보니, 브뤼쯔에서 3km 떨어진 곳에 독일군 탄약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탄약고를 폭파하러 온 영국 항공기는 브뤼쯔 읍내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만다. 


1944년 5월 7일 밤의 일이다. 

이날 두개의 폭탄이 20분 간격으로 떨어졌는데, 그 폭격으로 183명이 죽었다. 

이는 당시 주민의 38%에 해당하는 숫자다. 300명이 다쳤으며, 600명이 이재민이 되었다. 

더욱 폭격으로 인한 화재로 2차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이 사고로 한 가계가 몰살당된 경우도 있었다.


브뤼쯔에 있었던 이 폭격은 1944년 6월 6일에 있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앞선 조치로, 꼭 한 달 전에 벌어진 폭격이었다. 

영국 공군에 의한 이 폭격은 루와르강과 센느강의 철교들과 렌, 낭트, 뚜르의 비행장 파괴, 브뤼쯔와 쌀브리(Salbris)의 탄약고 파괴, 그리고 생-발레리(Saint-Valéry)의 레이더 파괴 임무들 중 하나였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군사시설이 있었다는 이유로 브르타뉴 여러 도시들이 당한 연합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은 무고한 시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잔인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좋은 전쟁’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도 전쟁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폭격이 지나간 브르타뉴의 도시들을 보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적군이나 아군, 누구에게나 비극이며 엄청난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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