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1년간 어학연수를 한 프랑스 '몽펠리에'의 '폴 발레리 대학' 앞에는 포도밭이 하나 있다.
포도밭이라기보다는 한 단독 주택의 정원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지 모르겠다.
2층짜리 하얀 집 뒤로 포도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집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몽펠리에 시내에 남은 유일한 포도밭이라고 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주변은 온통 아파트와 상점들로 빼곡했는데, 그래서 더욱 고집스럽게 포도밭을 지키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우연찮게 바로 그 집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몇 개월을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적조차 드믄 그 집에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정원의 무화과나무를 손질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담장 가까이 다가가 할아버지를 향해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안녕하세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은 노인에게, "저는 당신의 포도밭을 좋아하는 옆집에 사는 학생입니다. 제게 당신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딸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일손은 필요 없어요. 넓지도 않은 데다가 해마다 나를 도우러 친구들이 오거든요."
"저도 보수는 필요 없어요.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을 해 보는 게 제 소원이거든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할아버지께 떼를 썼다.
그리고 수확할 때 꼭 전화를 달라고 전화번호를 쓴 메모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러 날이 지나 할아버지는 약속을 지켜 전화를 주셨고, 나는 일할 차림으로 단단히 차려 입고 이른 아침 포도밭으로 향했다.
같은 연배의 할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이 먼저 와 계셨고,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포도 따는 일을 했다.
그 포도들은 양조장으로 보내져 포도주가 되어 온다고 했다.
일은 2시간 반만에 끝났다. 일을 마치고 그 분들과 쥬스와 간식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 집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내게 할아버지는 집안 곳곳을 구경시켜 주셨다.
고등학교 '지리교사'였다던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기르며 평생을 산 곳이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곳에 살았고, 지금은 혼자 다른 동네 작은 아파트에서 사신단다.
그 집의 모든 가구와 물건들은 아내와 살았던 당시 그대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또 곳곳에는 아마추어티가 풀풀 나는 직접 그린 그림들로 가득했는데, 이 집은 때때로 들러,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작업실로 이용한다고 하셨다.
자기 평생에는 포도밭을 팔 마음은 없다고,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아이들이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쓸쓸한 빛이 흘렀다.
아무튼 즐겁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보여주시는 할아버지의 작품들도 감상하고, 포도까지 한 봉지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라도 놀러오라는 말씀에 "예"하고 대답했지만, 몽쁠리에를 떠난 뒤 그곳을 다시 가보지는 못했다.
그 포도밭을 생각하면, 할아버지는 살아계실까?
포도밭은 건재할까? 늘 궁금했다.
그러다가 꼭 15년이 지난, 몇 년 전 나는 다시 몽펠리에를 방문했고 그 포도밭을 찾아갔다.
포도밭이 있었던 부근에 도착했을 때는 가슴까지 콩닥콩닥 떨렸다.
그 사이 동네는 더 많이 변해, 아파트와 커다란 마트로 옛날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런데...
있다.
건재한 포도밭을 보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칠이 잘 된 하얀집도, 포도나무들도 여전하다.
포도나무들과 함께 있던 과실수들이 그 사이 더 무성해졌다.
당시와 차이가 있다면, 포도밭 군데군데 할아버지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뜰의 철문 곁에 놓인 조각을 보니, 마치 이 집 주인 할아버지를 뵌 듯 반갑다.
당시 할아버지의 조각 솜씨는 아주 유치한 수준이었는데, 그 사이 실력이 정말 많이 느셨다.
그리고 여전히 포도밭이 존재하는 걸로 봐서 할아버지도 생존해 계시는 것이 분명했다.
옛날에도 그랬듯이, 포도밭은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
늦은 오후의 평화로운 풍경만이 나를 반겼다.
뜰에서 할아버지를 뵐 수 있었으면, 더 좋았으려나?
아니, 할아버지를 뵙지 못했어도 여전히 그대로인 포도밭만으로도 나는 또 하나의 소원을 이루었다.
그러고 보면, 이 포도밭은 내게 많은 소원을 이루게 해 준 존재이다.
변함없이 고집세게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감동적이다.